<"수덕사의 여승"에 얽힌 일화>
60년대 중반 발표되어 꽤나 힛트한 대표적 대중 가요다. 속세에 두고 온 애절한 사연을 잊지 못해 흐느끼는 비구니가 그려지는 조금은 단조로운 가사 내용이다. 그런데, 당대의 사람들은 이 애절한 비구니의 사연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그처럼 큰 반응을 일으키며 힛트할 수 있었을까 ?
그런 애절한 사연이 있을 법한 수덕사 여승의 실제 모델은 있었을까 ? 있었다면 그는 누구일까 ? 이야기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,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,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“사의 찬미”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명이요,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명이고,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이다.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.
나혜석은 사랑에 버림을 받고,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,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. 윤심덕과 나혜석의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 여기선 실제로 수덕사의 여승이었으며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김일엽의 이야기를 해보자.
김일엽의 본명은 “김원주”다. 일엽(一葉)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다. 그런 사연 때문인지 둘 사이의 스켄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애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자유 분방하게 살아갔으며 진취적인 자신의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“자유연애론”과 “신 정조론”을 주장하게 된다. 그녀가 80몇년전에 주장했던 신 정조론을 살펴 보자. “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. 정신적으로,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.
그런 여인을 인정 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, 그것이 바로 나다.”한마디로, 남녀가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순결 또는 정조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 는 이야기다. 당시 꽤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앞서가는 신세대의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. 당시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(지금도 그러하지만)라는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 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.
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와의 결혼하는데 남자가 의족을 한 장애인 이었다. 남자가 이 사실을 숨겼으므로 지금이라면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. 신뢰에 기반 하지 못한 결혼생활은 일찌감치 청산할 수 밖에 없었다. 이후 그녀의 생활은 더 더욱 자유 분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.
김일엽은 한국최초 여자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“오다 세이조”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.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 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수제국대 학생이었다.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, 이때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난다.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“김태신”이다.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.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. 오다 세이조와의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,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.
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,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.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었으니, “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”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다.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 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.
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?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. 가수이자 음성 포교사인 “수덕사의 여승”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위하여 절 앞에 있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-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.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에 맞지 않았나 싶다.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하나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?
일엽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.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“수덕사의 여승”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는건,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.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 직 하지 않은가.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(김태신)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설 <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.>에서 발췌했음을 밝혀 둔다.__퍼온 글__
1966년도에 나온 송춘희(1937~ )의 노래 ‘수덕사의 여승’은 대단히 히트하여
10년의 무명가수인 송춘희를 그해 10대 가수에 올려 놓았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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